그 녀석에 관하여
뭔가 떠들 생각만 해도 눈앞이 아득해졌지. 아마 불평불만이 구할 구푼이고 좋은 얘기라곤 한참 고민한 끝에야 나올 테다. 도시에 나가지 않고 이런 곳에 박혀 있어도, 바람을 타고 네 얘기는 전해졌지만.
평범한 모험가로 시작해 몸담은 조직이 붕괴했음에도, 다시 등불을 키기 위해 온 에오르제아를 돌아다니며 그 기공사 시드 갈론드마저 찾아버린 녀석. 온갖 신을 때려잡고 영웅이 된 소녀, 그러다 장대한 배신과 정치 싸움에 휘말리고, 그 끝에 도달한 천 년 망집의 도시에서도 전쟁을 끝낸 이방인 출신 푸른 용기사, 기어이 알라미고 해방군에까지 참여해 건국의 초석 중 하나가 되고, 이제 과거의 빛의 전사들이 그러했듯 대 제국 전쟁과 대 야만신의 상징이 된 영웅이라고.
그러나 그 영웅 놈은 집을 떠난 이래 내게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정변에 휘말린 와중에도 말이다. 물론 내게는 걔든 걔 동료든 숨길 능력조차 없지만. 한때 내가 사는 곳 근처에도 수상한 놈들이 얼쩡거리는 걸 자주 봤으니, 오히려 현명하게 굴었다고 칭찬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래도 난 네 가족이었단 말이야. 이제 단 둘 밖에 남지 않은, 진짜 가족.
그 녀석에 관하여
ff14 드림주 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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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브 = 드림주의 언니 시점에서 '빛의 전사'를 바라보는 이야기입니다.
5.2 시점에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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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우리 가족을 설명해야겠다. 내 눈동자만 봐도 내가 태양의 추종자 혈통임을 알 수 있을 테지만, 나는 다른 ‘전통적인’ 씨족 출신처럼 이복형제를 둔 적은 없다. 어차피 미코테는 특유의 영역 의식이 강한 탓에 도시 내에서는 혼자 지내는 경우가 많다만, 우리 가족은 그리다니아 저 외곽 지역에 살았으므로 그에 해당되지도 않는다. (그야 요즘에는 좀 구닥다리가 된 풍습이지만) 씨족의 보호도 받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하니, 어머니는 태양의 추종자고 아버지는 달의 수호자였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주... 전통적인 분위기의 씨족 출신이었다고 한다. 뭐 사막 외딴 곳에서 다 같이 모여 사는 그런 동네 말이다. 이미 약혼자까지 있는 상태에서 사냥을 나섰던 아버지와 눈이 맞았고, 많은 논쟁 끝에 야반도주해 정착한 곳이 그리다니아였다나.
나의 고향쯤 되는 그리다니아지만, 외부인을 반기는 분위기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런 고로, 두 사람의 정착에는 많은 역경이 있었다. 외관부터 전형적인 달의 수호자답게 생긴 아버지에겐 더욱 그랬다. (사견이지만 차라리 림사 로민사에 가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다. 들리는 말로는 거긴 ‘이민자들의 도시’라고 불릴 만큼 외부인에게 개방적이라 누구든 대환영이라던데.)
아무튼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알 수 없다 - 이미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 7재해 때문은 아니다. 그저 훌륭한 목수였던 어머니가 많이 아팠고, 그나마 마법에 재능이 있던 아버지는 하던 일도 관두고 환술을 배워 종일 집에 붙어 있으면서 어머니를 간호하고 정령에게 기도도 올리고, 에 스미 얀님에게도 자주 찾아갔지만, 환술로도 죽을 사람의 운명은 바꿀 수 없는 법이었던 것뿐이다. 나는 어머니의 일을 이어받았고, 동생은 아버지가 집에 있을 수 없을 때 간호를 전담했다.
지금이야 이렇게 덤덤하게 말할 수 있지만, 장례식 때는 나도 아버지도 아주 많이 울었다.
동생은... 어머니가 계실 때도 썩 말이 많은 애가 아니었으며 언제고 묘한 꼬맹이여서, 지치고 슬퍼 보이나 세 사람 중 가장 의연한 태도로 장례식에 온 손님들을 맞이했다. 너는 슬프지도 않냐고 소리치며 묻자, 그 애가 뭐라고 말했는지 아는가.
나는 엄마랑 오래 작별인사를 했으니까. 얘기도 많이 했어.
그러니까 괜찮아.
낮게 깔린 미미한 다정함과 호수 같은 깊음. 고요함.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 그 애에게서 등을 돌리고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으나, 사실 연장자로서 좀 다른 대처를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열 몇 살짜리가 온종일 죽어가는 사람을 책임지며 지낸 것이다. 모녀가 단 둘이서 같은 공간에 있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 것이며 어떤 교류를 했을지... 그리고 그게 그 애의 본성을 어떤 식으로 조형했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오히려 어머니와 그 애가 함께 있을 때 절로 풍기던, 정적이고 그윽한 분위기나 서로 간에 단단하게 짜인 관계 따위를 속으로 질투한 것 같기도 하다.
못됐지, 그래. 다만 나 역시 내 동생과 마찬가지로 열 몇 살이었고, 아버지 역시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다가오는 걸 인정할 수 없어 허둥지둥했을 뿐이라며 변명을 덧붙여 본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를 잃은 아버지도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니,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당신들이 무슨 원앙새인가???) 어쩌다 집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내가 미치고 팔짝 뛰어서 도망치지 않은 것만 해도 대견스럽다고 해야 하지 않나.
거짓말이다. 별로 칭찬받을 생각은 없다.
동생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유성의 환영을 본 것도 그 때쯤.
몸도 아프신 우리집 양반이 무슨 의기인지 쌍사당에 끼어들어 카르테노 전투에 참가한 뒤, 살아 돌아왔으나 모든 기력을 다 쓴 양 허약해진 끝에 돌아가신 것도 아마도 대충 그 때쯤.
아무튼 부모님을 모두 보낸 뒤에도 -부디 일곱 하늘에서 평온하시길- 우리 자매는 둘 모두 성인이라기에는 어리나 고아원에 가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고, 나는 우리 둘을 제외한 바깥세상 전부를 노려보며 무언가 또 빼앗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도대체 무엇을 빼앗길 걸 두려워했을까?
어쩌면 나 역시 동생이 감당해야 할, 고난과 역경이 가득한 긴 삶을 직감했을는지도 모르지.
... 죽기 전, 아버지는 빛의 전사들 얘기를 우리 앞에서 자주 했다. 그 전투의 생존자들이 모두 그랬듯, 사실 무언가 잃는 바람에 기둥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이 휘청거리지 않기 위해 그랬듯.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모험가들. 빛으로 뭉개진 듯한, 더는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고 세계를 위해 희생한 영웅으로만 기억되는 이들. 나는 그 말들에 상당히 지긋지긋해 했고, 죽은 이들에 매달리거나 그들을 영웅시하는 것도 상당히... 섬뜩하고 기이하다고 생각했으나, 동생은 달랐다. 그렇다고 뭐 정말 빛의 전사들을 기리려 든 건 아니나, 사려 깊게도 열에 들뜬 아버지가 넋두리처럼 중얼대는 말을 귀담아 듣고, 짬이 날 때마다 홀로 그리다니아를 쏘다닐 정도로 빛의 전사가 아닌 다른 영웅담에도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자들은 대개 모험가 출신이었다. 지금은 있는지 없는지도 검증 못할 고대 문명의 흔적을 탐험했다고 하더라. 한 마을을 마물 떼거리에게서 구한 뒤 홀연히 사라졌다더라. 이전 이전 재해 때 가장 선두에 서서 싸웠다더라. 막대한 부와 명성과 힘을 전부 손에 넣었다더라, 어쩌고저쩌고.
우리 숲의 도시에서 소문은 물결처럼 퍼진다. 새와 정령과 나무가 가득한 곳이니 말이다. 거기에 나는 그 애의 언니이기까지 하니, 당연히 동생의 새 흥미 분야가 생긴 모양이라는 얘기나, 동네의 자칭 학자를 쑤석대 옛 전설을 듣고 몹시 즐거워했다는 것 정도는 귀에 들어온다.
그쯤 되자 나 역시 좀 걱정이 되어 목수 일을 하며 보아온 모험가의 실상에 대해 알려주었고, 네가 집을 떠나 고생하지 않으면 좋겠다. 나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죽장이는 어떠니. 사냥하는 법을 익힌 가죽 공예가는 높은 대우를 받는단다... 같은 얘기를 실컷 늘어놓으며 동생 녀석의 흥미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 애썼다. 동생은 늘 그렇듯 잠시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혼자 둘 순 없으니까, 그렇지?
그래. 언니를 혼자 둘 순 없으니까.
그 말에 나 역시 안심하고 희미하게 웃었다.
아무튼, 동생이 기술을 배우는 사이 나도 연애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피 의식도 섞여 있었던 것 같지만, 몇 년 전의 나는 그 사람을 붙잡고 싶었다. 결혼이라는 단단한 끈으로 다른 사람과 나를 엮어, 절대 사라지지 않을 내 편을 만드는 건 꽤 근사하게 느껴졌다. 그렇지 않은가. 용기가 사랑을 낳으리라! 우리 부모님을 늘 보아왔으니 더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얼마 뒤,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프러포즈를 받았고, 나는 코를 훌쩍이면서도 웃으며 그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드물게 기쁜 마음으로 동생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동생 녀석 역시 드물게 환하게 웃고, 내 손을 꼭 잡고 붕붕 흔들며 축하인사를 건넸다. 아마 평소 거리보다 한 발짝 반쯤 더 가까이 다가왔을 텐데, 녀석의 그림자가 아주 길게 늘어졌던 게 어쩐지 묘해서 기억에 아로새겨진 모양이다.
사실 지당한 일이다. 문 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고, 막 집에 돌아온 동생은 당연하지만 문을 등 뒤에 두고 있었기에, 녀석의 그림자가 온통 내 몸을, 집을, 모조리 덮은 것이다. 아마 몸을 내 쪽으로 조금 더 기울인 것도 이유 중 하나이겠지만, 어째서 방금 전까지 눈치 채지 못한 걸까? 손을 찔린 듯한 위화감에 어물어물 눈을 굴렸다. 흘러내린 반지를 제자리에 돌리려 손을 털어버리기 전, 동생이 먼저 내 손을 떨쳐냈다.
나는 어색한 빈틈을 벽돌로 메우듯 단단한 말을 쏟아냈다. 예를 들어, 네가 내 고민이랬더니 그 사람이 참 고맙게도 너까지 데려가준다고 하더라. 다날란의 시골 쪽이긴 하지만 괜찮을 것이다. 마침 그 마을에 훌륭한 기술자 겸 상인이 있다고 하니, 너도 제자로 들어가 일도 도우며 자립을 준비하면 좋지 않겠느냐. 타지에서 일하지 않고 얹혀 지내는 건 네게도 부담일 테니까.
아니.
녀석은 몸을 바르게 곧추세우고 말했다.
이제 그만해도 돼, 언니.
“뭐?”
그만해도 된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한 가지 길로 해답이 질주했다. 사춘기의 꿈으로 끝난 줄 알았던 장래희망을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있었단 말인가?
“너 아직도 모험가 하게? 바보 같은 소리 마. 진짜 죽으려고 작정했니? 아니면 평생 남 심부름꾼 노릇만 하며 살게? 칼라인 카페 가서 봤을 것 아냐.”
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물었다. 동생은 고개를 내저었다.
“한 곳에서 평생 살기에는 내 청춘이 너무 아깝잖아. 죽을 생각은 없어. 많은 것을 볼 거야. 돈이나 명성도 뭐, 얻으면 좋겠네.”
“야, 너 아주 잘못 생각한 거야. 어중잽이 모험가가 할 일은 의뢰 받고 깽판 놓는 것밖에 없어. 내가 너 깡패 되는 꼴을 그냥 보고 있으리? 내가 그럴 것 같아? 내가 아빠한테 무슨 부탁을 받았는지.”
“알아.”
“알면서 이래?”
“언니 곁에 있어줄 사람이라며. 언니는 내게 해준 게 많아. 이제 언니 삶을 살아도 돼.”
“내가 너 데려가겠다고,”
“왜냐하면, 언니.”
“당연하잖아. 너는 내 동생이고 가족,”
“언니는 나를 별로 안 좋아하니까.”
그 말에 몸이 굳었다. 얼굴이 수치심과 패배감으로 확 달아올랐다. 울컥 머리까지 오른 피를 토해내듯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을 때, 또 녀석의 말이 먼저 나열됐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정말로 수고했어. 많이 힘들었지. 소리치고 싶을 때도 있었을 텐데 자주 참았잖아. 언니는 충분히 노력했고, 나도 그걸 알아.
곁에 있어줄 사람을 찾았다니 다행이지만, 꼭 그 사람과 함께하지 않아도 괜찮고. 이건 내 생각이긴 해. 아무튼, 언니 판단이겠지.
언니가 어디에 있든 행복하길 바라.
당혹감에 내가 멍청하게 서 있는 사이 그 녀석은 멋대로 나를 가볍게 끌어안고, 사뿐하게 돌아서 스쳐 지나갔다. 풀과 들꽃의 향이 났다. 홀린 듯 이끌려 걔의 뒷모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눈을 잘 뜰 수가 없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얼마 전 나눈 대화가 낚싯대를 당긴 것처럼 머릿속에서 휙 끌려 올라왔다. ‘혼자 둘 수는’ 없다는 말의 함의를 신경 썼어야 했는데. 그렇다고 그걸 언니에게 남자가 생기는 순간 홀라당 버리고 갈 거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야 했나. 내가? 비겁한 자식. 냉혈한!
나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도리질쳤고, 그제야 왜 이토록 시야의 빛이 사방팔방으로 산란했는지 알아차렸다. 눈물이 흔들림에 따라 수수한 마룻바닥에 후두둑 안착했다. 눈이 부셨다.
나는 선선히 인정했다. 나는 내 동생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명확하게 자각하지 못했던 사실이나, (사실 말로 하는 순간 그것이 불변의 진실이 될 것 같아 머릿속에서도 언어로 정돈하지 않기 위해 몹시 애써왔던 사실이나,) 기이하게도 녀석이 내 앞에 들이댄 순간 부정할 의지도 사라졌다.
아, 그렇게 오랫동안 노력해왔는데, 떠나는 그 순간까지 걜 좋아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 사실을 그 녀석에게 들키기까지 했다. ... 속이 메슥거렸다. 주먹으로 뺨을 벅벅 문지르다가 주저앉았다. 따끔했다. 무명지에 낀 반지에 광대 언저리가 종잇장처럼 얕게 베인 것 같았다.
* * *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나는 네가 죽는 꿈을 꿨다.
돌이켜보면 그게 딱히 네 잘못은 아니었을 거다.
아니, 너 때문인 건 맞지만 그게 네 잘못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다는 거야.
너는 어릴 적부터 좀 묘했지. 나는 너를 볼 때마다 수면을 떠올렸어. 혀끝에 호수가 맺히는 것 같았어. 물의 겉면에 제 얼굴이 이지러져 비치는 것을 보고, 누군가는 사랑에 빠져 숨이 멎을 때까지 바라본 끝에 흰 꽃이 되었다지.
나는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다. 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아. 네가 나를 투명하게 비출 때마다 나는 숨이 막혔다. 이지러진 상이 망막에 맺혔다. 내 모든 흉한 모습에서 도망치고 싶었어. 너를 좋아하고 싶었어.
왜냐하면, ... 너는 내 가족이잖아.
나는 누군가의 아내였다가, 곧 혼자가 되었어. 사람들은 너를 영웅이니 뭐니 부르지만, 내가 태어날 적부터 누군가의 아내가 아니었듯, 너도 태어날 때부터 이 모습 그대로, 무슨 대검과 창을 들고 피투성이가 되어 눈밭에 섰던 건 아니었잖아. 태어나서 십 몇 년을 우리와 함께 보냈고, 너와 내가 살아온 모습을 가장 잘 기억하고 있을 사람들은 이제 전부 사라졌다.
내게 가족의 죽음이란 그런 것인데.
우리가 우리도 되지 못하는 순간, 대체 누가 우리를 기억해주지?
나는 그와 헤어진 뒤에도 검은 장막 숲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 * *
울다하에서 공방을 차렸다. 곧 처분해야 했지만 말이다. 이혼 뒤에도 한동안 괜찮게 돌아가던 공방은 7성력 선포 직후, 소위 나나모 울 나모 암살 사건에 휘말려 망했다. ‘암살범’과 연관 있다는 소문 하나로 거래가 모조리 끊겨버렸다. 이방인이니 눈꼴시럽기도 했겠지. 누가 퍼뜨린 걸까. 녀석에 관한 얘기를 울다하에서 한 적은 없는데. 유력한 후보가 떠올랐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잠시나마 한 이불을 덮었던 남자가 그렇게 치졸하게 굴 거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내 사각진 공방은 구석구석 원재료와 주문이 취소된 반제품, 혹은 완제품, 치울 의욕이 잃은 톱밥과 도구로 가득 찼다. 빈 공간을 찾기 어려웠다. 입체 나무 블럭이 된 것처럼 바닥의 빈틈에 몸을 맞춰야 드러누울 수 있었다.
죽은 나무와... 죽어버린 노력과, 취소 규정이 의미가 없는 선주문과, 빚과, 얼핏얼핏 느껴지는 감시들. 호기심 어린 눈빛. 내가 이해하고 싶지 않은 세계.
이런 꼴이 그 녀석에게 알려진다면.
톱과 망치와 못을 사용하는 폭력적인 해결책 몇 가지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게 싫어서 되도록 멍하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쓰다 보면, 누군가가 쏘삭대는 소리가 맴돌았다. 계속 이런 식으로 살아. 어쩔 도리가 없고 알지도 못하는 일에 전부 휘둘리면서. 네 인생에서 따돌려진 채로 사는 거다.
이게 끝일 거라고 생각해? 아니, 시작이지. 걔가 나무라면 너는 풀이고, 주변 흙의 모든 양분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이고 끝도 없이 자라나는 거대한 나무 아래에 있는 셈이니까. 가엾게도, 어쩌다가.
닥쳐. 소리 없이 입모양만으로 중얼거렸다.
얼마 뒤, 암막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국왕 나나모 울 나모는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동생의 ‘모험가명’이 다시 등장했다. 이슈가르드는 5년 만에 국경을 완전히 개방했다. 모함은 위기였을 뿐, 영웅은 당당하게 누군가 안배한 것처럼 승리한다. 그리고 다시 모험을 떠난다. 세상은 당연하다는 듯 새롭고도 아름다운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신적으로 한계였다.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든 좋았다. 마침 부흥 계획이 세워졌다던 이슈가르드로 떠난 이유는 그게 전부다.
물론 그런다고 톱밥 단위로 갈린 정신이 되살아 날 리도 없으며, 이런 마음가짐으로 낯선 곳으로 도피하는 건 절대 좋은 선택이 아니다. 아마 내 동생 정도 되는 인물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나 그럴 것이다. 역마살 낀 녀석 같으니.
익숙하지 않은 양식의 머리쓰개가 조금 불쾌하다.
이 동네의 건축물은 보는 사람의 숨을 틀어막으려는 양 위압감을 내뿜는다.
어두운 회색의 단단한 성채와, 차갑게 얼어붙은 길거리. 창 밖 부흥을 목적으로 지은 광장에마저 빼곡히 할로네 신상이 채워져 있으며, 교황청 겸 대성당은 딱 한 번 본 뒤 학을 뗐다. 위압감이라. 어쩌면 정말 그게 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정령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두가 느끼는 그리다니아와 달리, 모습을 드러낸 적 없는 신을 온전히 믿고 외부의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신의 실존을 머리에 때려 박아야 했던 거겠지. 그나마 이게 전쟁 종결 이후 좀 나아진 거라니. 나도 모르게 한숨을 뱉었다. 커튼을 걷는 보람도 없는...
넌 도대체 뭐가 마음에 들어서 이런 나라를 위해 싸웠지. 이 동네 시장에서 산 가죽 장갑이 두껍게 버스럭대 신경이 온통 그쪽으로 쏠렸다. 기름 친지 오래된 작은 작업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한 것도 전부 그 탓이다.
“오랜만이야, 여기서 볼 줄은 몰랐지만.”
허,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한 손으로 더럽게 잘 부러지는 삼나무 목재를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톱을 쥔 채 고개를 삐걱삐걱 돌렸다. 폐의 바람이 모조리 빠졌다. 동생은 어릴 적과 별 다를 바 없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계면쩍게 허리에 얹었다.
등에 맨 창이 눈에 거슬렸다.
동생은 가벼운 걸음으로 도시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춥지도 않은지. 입매를 꾹 내리누르며 시선을 아래로 하고 따라 걷다 보면 가볍게 앞뒤로 흔들리는 손과, 손에 씌워진 반장갑 틈새로 살이 터진 흉터가 언뜻 보였다.
나를 보자마자 그리다니아의 미코테 족이면 푸른 용기사를 아냐고 물었던 꼬마들, 같은 곳에 산다고 다 아는 사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며 설교하자 눈뭉치를 던진 버릇없는 그 어린애들이 녀석을 보자 어설프게 경례를 붙이는 꼴을 보고선 어처구니가 없어 고개를 돌려야 했다. (“알고 있는 거 맞았네! 거짓말쟁이!”)
“여긴, 도대체, 무슨, 일로, 온 거야?”
“만날 사람이 좀 있어서.”
“왜 나까지 거느리고?”
나는 가쁘게 숨을 쉬며 그 뒤를 따라다녔건만, 녀석은 온통 다른 것에 신경이 쏠린 모양이었다. 그 ‘만날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건 명백했다. 동생의 수색 범위는 원을 그리듯 점점 넓어졌다. 처음에는 잊힌 기사 주점에서 서성거리고 주인장에게 무언가를 묻더니, 곧 바깥으로 나와 이제 창천 거리에까지 도달했다. 몇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고 난 뒤에야 포기한 듯 허리를 폈다. 아, 하고 작은 감탄이 그 애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녀석은 하늘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에 잠겨 있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슈가르드의 눈은 절대 아름답게 소복소복 쌓이지 않는다. 별빛 축제 언저리의 검은 장막 숲과는 완전히 달라서, 순식간에 시야가 나빠지며, 뺨이 따가운 정도로 거센 바람에 몰려 드세게 휘몰아치는 게 보통이다. 골목골목 건물에 부딪혀 길게 갈라지고 찢어진, 그래서 더 차고 날카로운 바람에 연갈색 단발머리가 휭 흩날렸다. 동생은 그저 베일처럼 얼굴을 가리는 머리칼을 넘겼을 뿐인데, 내 눈에 들어온 건 목에서 쭉 뻗어 셔츠 안으로 들어가는 베인 흔적이었다. 속이 거북했다.
나는 어쩐지 아주 아름다운 뿔의 사슴을 떠올렸다. 아주 날렵하지만 올무만 있다면 잡아 목을 베지 못할 것도 아닌 무언가. 무심코 뻗어 당겨 내리듯 붙잡은 손에는 절대 가죽만을 다듬어선 생기지 않을 굳은살이 빼곡했다. 턱과, 온 몸의 근육에 빠듯하게 힘이 들어갔다는 걸 반 박자 늦게 깨닫고 억지로 힘을 덜었다. 오늘은 못 찾을 것 같은데, 이만 돌아가지 그래.
눈을 끔뻑이는 동생을 이끌고 나는 결국 내 작업실로 향했다.
돌아와서야 화등잔도 끄고 가지 않은 걸 깨닫고, 깊은 한숨을 뱉으며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집에 불 날 뻔 했네. 동생은 그러다가 머리 다 상한다며 나를 말렸다. 내 머리카락의 가장 큰 적은 너라는 빈정거림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전에 이슈가르드에서 한참을 지냈다면서. 이런 날씨에 바깥에 있고 싶냐.”
“그래도 걔한테도 언니를 소개시켜 주고 싶었는데, 어디 간 거람.”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총장, 이 아니라. 의장에게 들어서.”
총장. 혹은 의장. 내가 여기 온 이래 귀족원과 평민원의 회의 날에 멀리서 입장하는 걸 한 번 본 게 다인 그 엘레젠 말이지. 대화의 아귀가 잘 맞지 않았다. 기껏 차를 우려서 내줬지만 녀석은 입가를 매만지며 테이블에 앉아 있을 뿐, 손도 대지 않았다. 무슨 전할 것이라도 있느냐는 표정으로 빤히 바라보았는데, 딱히 할 말은 없는 것 같았다. 결국 내가 먼저 운을 뗐다.
“손에 그 흉터는 어디서 생긴 거야?”
아, 보이나? 관찰력이 좋네. 어쩐지 조금 쑥스러워 하며 동생은 장갑을 슬 끌어당겼다. 그래봤자 한번 눈에 들어온 게 사라지지도 않는데도.
이건 예전에 야만신 가루다와 싸울 때. 생각보다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았어. 목에 있는 그 상처는?
미친놈한테 걸려서. 이겼으니 됐지, 뭐. 조만간 다시 싸우게 될 것 같긴 한데, 지지는 않을 거야.
안 죽은 게 용하군.
죽을 생각은 없다고 예전에도 말했잖아, 믿어주면 좋겠어.
그리고 또,
말간 눈을 제대로 바라보기 힘들었다. 동생이 되물었다. 그리고 또?
싸우다 다친 곳 있으면 전부 불어. 이를 딱딱거리며 선언하자 동생은 선뜻 답하지 못하고 문치적댔다. “왜? 아까는 잘도 줄줄 말하더니만.” 그야 하나하나 답하기에 너무 많았던지, 만난 이후 내가 내내 역정난 상태였다는 걸 드디어 깨달았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슬쩍 작업실을 둘러보더니 갑작스레 어머니의 솜씨를 꼭 닮았다며 되도 않는 칭찬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야만신 가루다. 드라바니아의 가장 포악한 야만신. 예전이라면 몰랐을 이름이다. 나는 묵묵히 화를 참으며 녀석이 하는 꼴을 지켜봤다.
동생은 순식간에 할 말이 다 떨어졌는지, 내가 아까 썰던 삼나무 목재 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등잔의 기름이 거의 다 떨어져 그림자마저 볼품없이 일렁거렸다.
녀석은 마침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슈가르드도 전에 비해 꽤 얌전해진 편인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내 이름 팔아.”
“그게 오히려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하고.”
“그래서 오늘 언니를 걔랑 만나게 하려고 했던 거지. 총장은 영리하지만, 어차피 어디서 샐지는 모르는 노릇이라.”
녀석은 수첩을 꺼내 한 페이지를 대충 죽 뜯어 만년필로 빠르게 휘갈겼다. “잊힌 기사 주점의 시두르구에게 전해. 리엘이라고, 엘레젠 족 여자애 하나랑 같이 다닐 거야. 오늘은 자리를 비운 모양이지만...”
구깃구깃 접어 내민 쪽지를 빼앗듯 손에 쥐고 곧장 펼쳤다. 녀석이 얼굴을 조금 찌푸렸지만,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나야. 전해준 사람 얼굴 보면 알 것이라 생각함. 한동안 못 올지도 모름. 잘 부탁해.]
“다시 어디 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데?”
“아직은 모르지.”
“어디 가냐고 했잖아. 요즘 제국과의 전쟁도 사실상 휴전이라고 들었는데.”
“조금... 멀리? 아마 오랫동안? 아무튼 해봐야 알아. 아, 연락 기다리지 마.”
할 얘기가 많았다. 네가 왜 나를 지키는 것처럼 굴지, 머리 좀 굵어졌다 이거냐. 연락은 무슨 편지 한 통 안 해놓고서 무슨 생각인지. 너는 끝까지 어떤 뜻있는 대화도 하지 않을 생각인가. 내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처럼? 예전처럼? 또 네가 생각한 것을 짐짓 펼쳐두고 떠나면 그만인 양 굴게? 너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이게, 전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동생은 창을 단단히 등에 맨 뒤 몸을 돌렸다. 그러고서는 진지한 얼굴로 하는 얘기가. 경첩에 기름 좀 치지. 였다.
악천후 탓에 가시거리가 짧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바깥은 새까맣고, 가로등의 작은 불빛만이 드문드문 거리를 밝힐 뿐. 또 몇 년이 지난 뒤에야 만날지 알 수가 없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는 녀석을, 나는 본다.
누군가 툭 손을 얹고 등을 밀어준 기분이 들었다.
솜털이 오소소 솟아올랐다가 가라앉았다. 바싹 각을 세웠던 어깨선이 내려가 둥글게 다듬어진다. 그 손의 크기를 역산하자면 꼭 나와 같은 크기일 것 같았다.
점성원 근처에 배달을 들렀다가 점성술사들의 얘기를 들은 적 있다. 하늘의 별자리는 명확하게 선으로 이을 수 있을 것 같지만, 별자리를 구성하는 별이라 해도 정말로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천구는 넓고 거대하고 둥글어 행성의 붙박이인 우리들이 볼 때 입체적인 앞뒤의 거리감이 사라지는 것이라,
가장 혹독한 겨울밤에 겉보기로 겹치는 별자리는 실은 여전히 몇 억 말름은 떨어져 있다고.
확신에 사로잡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우리는 아주 오래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너는 언제나 마음에 걸리는 건 없는 사람처럼 작별하지. 거리도 짐작하지 못하겠어.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해야 할 말은.
여전히 너를 좋아하지 못해.
툭 뱉은 말에 동생이 걸음을 멈췄다. 예전에는 대꾸라도 했는데. 어떤 놈들을 만나 살았는지 몰라도, 이런 말을 묵묵히 들어주는 꼴에 부아가 치밀었다. 그러나 이건 별개지. 적어도 지금 말할 거리는 아닐 테다. 시간이 아깝다. 지금 외에는 할 수 없는 말을 해야 했다.
뭐 너는 생각도 안 해봤겠지만 너랑 만나는 일은 드무니까, 그러니까 만약을 대비해서 하는 말인데.
응.
네가 아주 대단한 사람들을 뼈만 남을 때까지 불태운대도, 혹은 어, 거대하게, 아예 이 세상을 끝장내는 한이 있어도, 그래서 누구도 구하지 못한대도.
... ...
만약 그 세상이,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라고 해도. 그래서 네가 아주 많은 사람의 믿음이든 아님 의지, 소망, 그래 그런 근사한 것들을 모른 척하거나 배신하게 된다고 해도 말이지.
... 아니지, 차라리 늘 그러길 바랐던가? 무심코 양 팔을 교차해 몸을 감싸듯 어깨를 움켜쥐었다. 억지로 고개를 들어보면 손가락 두 마디 정도는 키가 커진 동생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겨우 두 마디. 그래서 가까스로 입을 열 수 있었다.
나는, 난 언제나 네 편이야. 알겠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 그게 시간이든 공간이든,
나는 언제나,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세상이 네게 뭐라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네 편이라고.
어쩌면 아주 오래 전에 한 말 같기도 했다. 혹은 촛불로 훅 불어 꺼트린 먼 미래에 몇 번이고 거듭 중얼거린 나머지, 시공간을 넘어서서 새겨진 말일지도 몰랐다... 이 말을 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포함한 세상 전체와 싸워온 것 같았다. 왜 이런 근거도 없는 생각이 드는 걸까.
자기 자신에 위화감을 느끼기도 전 녀석이 소리 없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꼭 처음 나를 버리고, 가 아니라 두고 간 날처럼.
그런 포옹이었다.
느슨한 온기가 번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렁이는 건 위화감이나 불쾌감이 아니라 안도였다. 어째서일까, 너랑 연관만 되면 십중팔구 내가 모르고 알 수도 없는 일들만 벌어져. 아주 짜증나 죽겠어. 헐쑥한 낯으로 말하며 나는 동생을 꾹 부둥켜안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무거워. 떨어져.
무슨 일 있었어?
그걸 이제 묻냐. 묻지 마. 내가, 해결할 수 있어. 내 인생이야, 너나 잘, 살아, 이 망할 것아.
고개를 빼꼼 든 녀석의 시선을 피하고, 나는 킁킁대며 목을 가다듬었다. 아까 비단 띠를 뽑아내듯 우르르 쏟아지던 말은 다 어디로 간 것인지. 이 짧은 말을 하며 몇 번이나 볼 안쪽 살을 씹었다. 찝찝하고 묽은 피 맛이 났다. 위치 탓에 잘 보이지 않겠지만, 중심을 가로지르는 얇고 비뚤한 점선이 흉으로 남겠지.
망하지 말고 잘 살라고. 괜히... 이상한 걸 막, 책임지려다가...
응.
돌아버리지나 마.
... ... 노력할게?
나는 다시 울컥 짜증을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간의 영웅은, 이 시대의 빛의 전사이며 이방인 출신 푸른 용기사 어쩌구에, 분명히 내가 모를 수십 가지 문학적 칭송을 받아왔을 내 동생은, 새하얗게 웃으며 몸을 뺐다. 녀석은 다 식어빠진 찻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이번에야말로 정말 거리로 나갔다. 문이 힘겨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곁눈질로 본 도시에는 여전히 눈이 푹푹 내리고 있었다.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무엇이 감당하기 어려운지도 생각하지 않으며 그저, 지긋지긋한 나라에서 지긋지긋한 인간까지 만난 덕에 몹시 지치고 피곤할 뿐이라 주장했다. 그나마 이번에는 울지 않았다는 게 위안거리였다. 광장 근처의 방이라 끊임없이 소음이 침범하는 게 보통임에도 모든 소리가 세 배쯤 옅었다. 멀고 초연했다. 아득했다.
* * *
그런 기분도 잠시. 나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직후 느낀 것은 엄청난 배고픔이었다. 종일 전력질주를 한 것처럼 기진맥진했다. 산 도도 다리라도 뜯어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호수 하나를 다 들이켜거나.
급히 식당으로 달려가 허겁지겁 배를 채운 뒤에야 주위 얘기에 귀를 기울일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 물론 사람들이 새 광장 가스등 불을 켜는 날에 리본을 자르는 행사가 있다느니, 그날 누가 반드시 참석할 것이니 아니니 따위의 화제로 담소를 나누고 있기에 질색을 하고 작업실로 돌아왔지만 말이다.
그리고 곧장 작업을 재개했다.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 익숙한 작업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슈가르드는 거의 매일 흐려서 커튼을 걷는 보람도 없으나, 그래도 나는 매일 아침마다 검붉고 두꺼운 융단 커튼을 올려 묶는다. 서리 낀 창에 얼굴이 희미하게 어린다.
계속 그렇게 살아라, 하고 목소리가 중얼거리면 나는 따분하게 대꾸한다. 이렇게 살 거야. 계속. 도시에 나가지 않고 이런 곳에 박혀 있어도 그 잘난 모험담은 계속 전해지는데 어쩌겠어. 한 점 흐림 없는 마음으로 걜 마주할 날이 오지 않듯, 가로 걸리고 드리워진 흔적도 지워지지는 않을 테니까,
이것이 나의 결론, 몇 번이고 비춰보고 쳇바퀴를 도는 것 같은 생각 끝에 지은 매듭.
가끔 생각한다. 어느 시점 이후 내내, 고의였든 고의가 아니었든 그 애에게, 같이 있던 순간마다 그 애를 괴롭혀왔을 ... 그런 요인이 된... 내가 준 것.
한 잔의 차.
과거에 독을 마신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누가 준 음료든 어지간해서는 손도 대지 않는다지. 나는 또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그런 인간이 무슨 생각으로 몇 년 만에 만난 남의 잔을 받은 건지, 나는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이유로도 납득하지 못한다. 다시 만나면 꼭 물어볼 생각이다. 설령 몇 십 년이 지나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세상에서 보낸 시간이 그렇지 않았던 시간보다 더 길어진 뒤래도 좋다.
틀림없이 넌 아무 생각도 없었다고 답하거나,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며 시선을 옮기거나, 혹은 아예 기억도 못한다고 대꾸하고 끝낼 테지만 말이지.
당연히 시간이 많이 남을 것이다. 커르다스는 7재해 전만 해도 쾌청한 고산기후였다니, 이 한파도 영원하지는 않을 테며, 구부 머리통에 파릇한 싹이 트면, 아마 천을 머리 위에 드리워 햇살을 가리는 야외 카페 따위도 다시 생길 것이다. 그러면 그 때는 이야기를 듣자. 내가 모르는 수많은 이야기, 네가 네 눈으로 본 세상을.
그리고 나는 너를 다시 배웅하겠지.
아니 사실, 그러지 못해도 이미 충분했다.
왜냐하면 너는 나의, 내, ...
* * *
꽤 예전에 쓴 글인데, 자매 간의 애증()이라거나 영웅 곁의 평범한 사람이라거나... 뭐 이것저것, 좋아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어 이쪽에도 올려둡니다. 언니 시점의 8재해 이후를 다뤘던 무언가도 있는데... 역시 그건 공개할 만한 건 아닌 듯?
빛전 씨는 이 뒤에 정말로 언니 찾아가지도 않았다네요. 헐. 재수없음.